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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도락산 자락 도락 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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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 명장 동기 모임]
앞줄 좌로부터
홍윤표(철도), 이재신(항공), 최태명(압연), 지대수(조선용접), 오금석(석공예), 강이환(장식미술)
중간줄 서동규(도자기), 뒷줄좌로부터 한광덕(특수용접), 한춘섭(조리) 심일섭(전자기기)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 (서동규 도자기 명장님 주관)
[돼지갈비, 삼겹살 구이]
[조리명장이 보고 있넹]
[ 시골돼지 한마리 수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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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장목면 학섬쉼터 : 건설중인 가거대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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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강]
[외도]
[양귀비 꽃]
[외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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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신임명장 환영회 및 대한민국명장회 단합대회]
[행사 사회 및 총괄 진행]
접수
개회식
2008년 신임 명장 소개
행사에 참석한 명장님들 ...
건배 ....
레크레이션 ~
3부 노래 자랑
시상식 : 대상
명장님 단체
명장님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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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2000명장회 모임을 단양 방곡 도예 서동규 명장님 댁에서
실시 : 28명 참석
[미리 도착하여 한춘섭 명장님 부부와 취나물 채취하러 산에 올랐다가 "산삼"을 캤습니다.]
[지대수 명장님 사모님이 몸이 불편하여 산삼을 선물 했습니다.]
[서동규 명장님 사모님이 해 주신 "송이, 능이 찌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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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능인의 꿈을 이어가는 산업전사 꿈을 향하여 서울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 여행으로 한번 가본 것이 유일하고, 낫 설고 생소한 곳, 시흥에 소재한 대한전선 텔레비전 공장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28년이란 세월 동안 몸담고 있던 회사는 주변 환경에 따라 이름은 네 번이나 바뀌었어도 오직 한 자리에서 우물만 열심히 파는 기능인이 되어 정부가 인정 해준 2000년 전자기기 분야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첫 월급 이만 팔천 원을 받아 자취 생활을 하면서 기능인의 꿈을 키웠고, 선배들께 구타를 당하면서 까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참고 노력했던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흘러갑니다. 텔레비전 수리사가 되기 위하여 쉬는 시간, 점심시간도 스스로 반납하고 노력한 일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적은 월급으로 살아가려면 회사와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월세가 적은 곳에서, 걸어서 출, 퇴근해야 했고 심지어 수도가 나오지 않는 집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찬물에 쌀을 씻어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며 지내왔던 시절에도 꿈을 향한 노력들은 새삼 내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수리를 하던 때였습니다. 한번은 반장이 “이것 뭐야” 하시기에 수리 하려고 보니까 기판이 파손되어 여기다 놓아두었습니다. 하니까 “이 자식 너희 둘이 이리와” 하시면서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만 “바른대로 말해” 하면서 뺨을 한대씩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니까 “이거 너희들 수리 못하니까 일부러 파손 시킨 거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기가 막혔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친구와 둘이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맞은 것이 더욱 서러웠고 더군다나 잘못이 전혀 없다는데 분통하여 눈물이 많이 났던 것 같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고향으로 당장 내려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고 취업할 때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너희들은 전자과1회 졸업생인데 회사에서 열심히 해야 후배들 취업이 잘 된다“라는 특별한 당부 말씀이 있었기에 회사를 그만 둘 수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선배, 직장상사의 말은 법이요, 따라야할 의무인 시절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울에서 구미로 공장이 이전하여 3년이 지나도 선배들이 많아서 승진의 기회는 도무지 앞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마냥 수리만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공과대학 진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1년 내내 독학으로 새벽2시까지 기숙사의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과장님께 대학 시험 보러 간다고 휴가를 내 달라고 하니까. “이 사람아 나도 대학 나오지 않고 과장하잖아 지금 늦게 대학가서 고생해서 졸업 했다고 치자 취직 제대로 못하면 헛일 아니야, 이번에 라인을 하나 창설하는데 네가 조장을 맡아 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큰일이네” 하시면서 “그 동안 익힌 기술은 대학가면 다 쓸모없는데 아깝지 않니” “이만한 대기업에 취직하기 쉬운 것이 아닌데.” 라는 말에 1년간 고생한 것을 뒤로하고 내 나이 23세에 조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로는 나이에 비하면 상상도 못하는 직책이라 진학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에 대한 열정 ‘82년도가 접어들면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하여 월급이 한달씩 미루어지고 전자제품을 팔러 연고지가 있는 농촌이며 탄광촌으로 내 몰리기 시작 했습니다. 의무적 제품판매에 직접 떠안기 까지 하였으며 결국 구조조정으로 인원을 줄이고 자구책을 찾았지만 ’83년에 대우전자로 양도, 양수되어 활기찬 새로운 회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85년도 대우전자에서는 처음으로 컴퓨터용 모니터를 생산할 라인을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때 반장으로 승진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 사원들은 상상도 못할 세계1위 컴퓨터 회사인 IBM으로부터 OEM모니터를 수주하게 되었는데 첨단기술로 설계된 제품이라 생산에 대한 보안이 엄하게 적용되던 제품 이었습니다. 우선 IBM기준에 맞는 품질과 생산납기를 준수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일500대 생산에 샘플링검사에서 무결점으로 합격해야 출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우리 실력으로는 엄청나게 어려운 상황이고 경험도 많지 않았으며 타 회사의 정보도 전혀 없는 상태라 프로젝트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반장인 나와 과장님과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단, 중, 장기 계획을 세워 프로젝트 성공적 달성 계획을 제출하니까 IBM매니저 하는 말 “대만에서 이것보다 쉬운 제품을 3년이 넘게 생산했는데 일400대 생산하고 삼성이 1년이 넘게 생산하는데 350대 수준인데 너희들이 어떻게 2개월 만에 500대를 생산하겠다는 것이냐” “충분하고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우리라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충분한 생산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우의 ‘도전정신’ 하나로 해 보겠다는 의지 하나뿐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은 진짜 일심동체가 되어 세웠던 계획에 따라 처음 작업공정부터 마지막 출하공정까지 담당자 전원이 참석하여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하였고 사업부장님께서 “모든 결정은 라인 반장 위주로 하고 목표달성을 위한 투자는 전폭적으로 지원 하겠다” 는 엄명이 있었던 관계로 과감한 개선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생산설비를 옮기고, 붙이고, 지자계룸을 개발하고 가장 효율적인 작업순서를 찾아 표준화를 시키고 품질과 생산성향상이 가능한 대책이 수립되면 그날 밤을 새워서라도 완료하여 결과를 볼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으로, 생산 시행 55일째 되던 날 일 생산 530대와 무결점 합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염이 텁수룩하게 나 있던 IBM매니저가 “과연 대우는 다르다”라면서 칭찬이 있었고 전사원이 모여 1차 목표달성 축하 다과회가 현장에서 있었으며 그 동안 수고한 사원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한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1차 목표를 시작으로 일1,200대 생산과 무 샘플링검사 단계를 통과해서 단일 모델로는 전무후무한 250만대 생산의 공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100만대를 돌파 했을 때는 대우전자 사장, IBM 한국사장 등 고위 간부가 참석한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 달성 다과회를 역시 공장 현장에서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서 공헌이 가장 많다며 반장인 나를 소개 하면서 100만 번 생산제품 테이프 카팅과 영구 보관 사인에 참석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어렵고 큰 프로젝트 달성으로 모두들 즐거워했으며 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모니터생산 잘 할 수 있는 법’ 이라는 책을 직접 만들었었고, 바이어가 경비를 부담하여 일본 IBM공장 견학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보잘 것 없는 책자지만 그때의 어려웠던 활동 내용을 기억해 보면 그 시절이 더욱 그립기도 합니다. 또한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동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꿈을 키운 시절 나는 1958년 산 좋고 물 맑은 고장 경북 김천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온천지에 푸름이 가득 찬 희망의 계절 5월에 여러 가족들의 기대와 환호를 받으며 6녀 1남의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때에는 대부분의 가정이 그랬지만 저희 집은 남들보다 가난한 생활이었고 벼 한 포기 심을 수 있는 논 한 평이 없어 남의 집 밭을 얻어 농사를 지어 새경을 주고 남는 것으로 겨우 연명해 살았으며, 5일장이 되면 소장수들이 묵어가는 마방이라는 소들의 숙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중학교 까지 시골 5일장 전날은 일찍 집으로 가야했고 소들을 먹일 여물을 만들기 위해 벼 집단을 산더미처럼 작두로 쓸어야 했고 가냘픈 몸을 가누면서 물지게로 양동이 두개를 달아 물을 길러 가마솥에 가득 채우고 나면 서산에 노을이 빨갛게 피어나곤 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생계를 꾸려 나가려고 어머니는 동네 삯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라 우리는 왜 이렇게 못사는지를 한탄도 했지만 곳곳에 베어 있는 부모님들의 노력과 오직 너희들 공부 시키려고 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부모님들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 지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책값 백 원이 없어서 책값 안주면 학교 안 간다고 우기다가 “이 놈 학교 가기 싫으면 그만둬” 하시면서 지게작대기로 아버지께서 내리치려고 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 도망가고 아버지는 따라 오는 형상을 하여 학교까지 4킬로인데 2킬로까지 따라 올 때는 이러다가 우리 아버지 학교까지 따라오면 큰일이다 싶어 다시 집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리어 집으로 간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고향에서는 부자로 살았답니다. 친척과 창호지 사업을 하다가 망하여 외갓집이 있는 김천으로 이사 오면서 어려운 살림이었으니 옛날 선비처럼 머리에는 상투를 하시고 항상 망건을 쓰고 계셨으며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었었는데 그날은 맨 상투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학교까지 따라 온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하여 맞아 죽어도 집으로 가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깟 책값 백 원도 못주면서 왜 나를 낳아서 창피하게 하느냐고 대꾸까지 했으니 죽이도록 미웠는지도 모르지요.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가끔 그때 생각으로 눈시울을 적시곤 합니다.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던 노동조합 간부 조장, 반장이 되면서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을 위하여 최소한의 권익을 찾자는 의식을 가지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대투쟁 시기에는 오히려 회사와 관리자뿐 아니라 반장들에 대한 부당한 불만도 상당히 많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 이였고. 반장은 노조원 이면서 말단 회사 일을 시키는 간부로서 대부분 회사 측에 의식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는 반장을 하면서 노조 간부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고 더군다나 직선제로 선출하는 대의원은 거의 당선되기 어려운 상황 이였는데 10선 이상 대의원에 출마하여 3표 이상 반대표를 받지 않았고 경선 시에는 낙선 한번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88년도 대의원 선거 시에는 타 선거구에는 반장은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는데 당당히 100% 찬성으로 대의원에 당선된 반장이라는 소식이 회사 내에 전해지면서 노, 사간 큰 관심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관리 감독자들에 대한 불신이 높았던 시기라 해도 반드시 믿음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동료들 때문에 더욱 참다운 노조간부로 태어나게 하고 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94년도 초 대우전자 노동조합 사무국장 시절, 여태까지는 노사간의 힘의 논리와 고압적인 자세로 임하던 시절을 접고 서로가 신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올해부터는 좀더 발전적이고 효율적인 노사 관계를 정립해 나가자” 고 제안을 하여 회사를 움직이는 회장님, 사장님을 비롯한 경영진들과, 위원장, 지부장을 비롯한 노동조합 간부 등이 한자리에 모여 허심탄회한 “노사합동 경영 토론회“를 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토론 내용은 회사경영에 대한 비효율성 사례, 비인간적인 요소 등 모든 내용이 총망라되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져 참석한 노사간부 전원이 아주 유익한 행사였다는데 공감하고 그 후로 서로간의 불신의 벽을 깨고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했고 회사는 복리후생에 어려운 살림을 쪼개어 개선을 했으며 노조는 제품팔기 거리 홍보전, 전 사원 소비자께 편지쓰기 운동 등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회사는 기업문화 선포식(탱크주의), 노사공동 선언문 채택, 정부로부터 노사화합대상 등 모범적인 노사 관계의 모태가 되었다고 생각되며 처음 토론회 제안과 토론주제 정립, 노동조합 의견수렴 조율 등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회사를 회사는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인식을 재정립하게 해준 공로로 보기 어려운 현직 조합 간부의 한사람으로 사장 공로패를 받은 바 있습니다. 혁신의 전도사가 되어 노동조합 사무국장 임기 3년을 마치고 조합 간부들의 권유로 조합 간부를 유지 할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한번쯤 해볼 봉사라고 생각했기에 다시 현장 원직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단체협약에 의하면 “노동조합 전임자는 임기가 만료되면 원직으로 복귀 한다”라고 되어 있어 다시 모니터공장 반장으로 가야 하지만 후임자가 반장을 하고 있어 모니터생산팀 지원 반장의 보직을 받고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회사 방침이 ‘96년부터는 지원부서 반장은 인정되지 않고 직접 생산하는 현장만 반장으로 인정한다는 공문이 내려옴에 따라 현장으로 복귀를 하거나 관리직으로 변경하거나 선택을 해야 하는데 공장장께서 관리직으로 변경을 할 수 있도록 추천을 해 주어 ’96.1.1일부로 생산팀 지원담당과장의 보직으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관리직은 통상 대학 졸업자의 조직이며 기능직은 전문대졸 이하 졸업자 조직 체계로 나뉘어져 있어서 특별한 방침이 없으면 서로 직급 변경이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사 발령이 나던 날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모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노동조합 현직 부지부장 한명이 아침 출근과 동시에 사무실로 찾아와 다짜고짜로 “노동조합 팔아서 과장된 놈 당장 사표 써라” 고 외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을 하면서 난리를 피웠습니다. 주변 동료들이 간신히 진정시켜 불상사 없이 조용히 돌려보냈지만 저는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아니고 언제 내가 노동조합 팔아서 과장된 것도 아닌데, 이 난리를 피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무슨 영문인지도 알 길이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민주노조 한답시고 외부 세력과 연결되어 활동하다가 사규 위반으로 해고를 당한 사람이지만 그 당시는 황당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후 내용을 상세히 알아보니까 자기가 잘못 알았다고 사과는 했지만 노동조합 간부를 했다는 이유로 직급 전환 한 것이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 했습니다. 기능사원 출신 과장이기 때문에 고졸이기 때문에 손가락질 받지 않는 관리자가 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이며 많은 기능사원들도 능력이 있어 직급 전환이 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 했습니다. “혁신의 전도사”란 별명은 공장 혁신이 한창 잘 진행되고 있을 때 동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혁신 활동 담당자는 우선 이론과 기능이 겸비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능은 그동안 습득한 것으로 충분하지만 이론적 체계는 부족하여 자료수집, 학습, 교육 연수 참가를 많이 했으며 생산시스템 선진국이라 생각되는 일본 견학 및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 했던 것이 고정 관념을 탈피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 됩니다. 또한 활동을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것도 혁신 활동에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먼저 작업자 입장에서 검토를 해야 했고 생산성과 품질향상을 위해 아무리 좋은 기법 및 설비가 있다 해도 작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며 효과는 반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 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체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활동을 우선적으로 시작하여 생산 공장 작업자들의 비효율적 작업 개선에 초점을 두고 생산 라인별 장점을 극대화 하여 전 라인에 전파하고 단점은 보완하는 일부터 시작으로 작업순서 표준화, 간이자동화, 설비효율 향상, 공정의 정류화, 조직의 슬림화, 작업의식의 공유, 공동체 의식, 등을 전개하여 한 단계, 한 단계 발전시켜 마침내는 공장 자체 내 효율이 매년 20-30%씩 향상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97년 대비 ’98년 실적을 비교해서 활동한 내용을 크게 보면 경비절감 년49.3억원, 해외공장 조기 안정화를 이루었던 실적들을 높이 평가하여 ‘98년 대우전자 전사 각 부문 실적 심사에서 ’생산부문 대상‘을 수상하여 트로피와 부상을 받았으며 사장님 이하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신활동 우수사례 발표를 했으며 개선 아이디어 중에는 제안으로 채택되어 전사 ’은상‘으로 상금과 상장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개선 활동이 단 시간 내에 이루어 졌지만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작업자들의 엄청난 반발도 있었고, 중간 결재권자들의 망설임, 보류 등이 있었지만 개선 활동으로 일어나는 예상 효과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고 설득을 통하여 이룰 수 있었으나 타부서 특히 공장 전체 혁신팀장은 협조 사인 란에 사인을 “문제가 예상됨”으로 사인을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철저한 검토와 시뮬레이션으로 확실한 방법을 찾아서 해 낼 수 있었고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휴일 날 팀원끼리 개선작업을 스스로 실행하여 비교 분석 결과를 확인 후에 전체적 실시를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해외 공장 가동 시 파견되어 중국, 멕시코, 브라질, 공장에 적용하여 빠른 시간 내에 안정화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공장은 모니터를 합작으로 만들어 온지가 5년이 넘었지만 체계적인 개선활동이 없었던 관계로 현지 부총경리의 지시에만 따르는 불합리적인 요소가 있었고 개선 활동을 하려고 해도 모든 사항은 재차 중국 현지 관리자께 보고 후 실시를 하는 관계로 효율적인 진행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민 끝에 총경리 이하 전부서장들을 모아 놓고 “부서장들께서 내가 지시 하는 것에 따른 것이냐, 말 것이냐?” “각 부서별로 내가 지시하는 개선 사항에 대하여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 실천 하겠다.” “이 두 가지만 약속하면 출장 한 달 중 생산성 100%, 품질 50% 향상 시켜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말을 하니까. 전부가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목표를 1개월 내에 생산성향상 100% (일 500대에서 1,000대)로 정하고 달성하면 “내가 출장비로 전체 회식을 시켜주겠다” 라는 약속을 하고 활동을 전개 하였습니다. 전체 인원 재교육, 매일 아침 조회 때 오늘 목표 부여, 작업공정 재편성, 인원재조정, 중복작업 삭제, 자기작업 책임제, 자주관리 실시, 작업순서 표준화 등을 작업자 마다 시범을 보이고 동시에 양, 부 판정 기준을 알려 주었습니다. 간단한 몇 가지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주일 정도 지나니까 출입구 게시판에 분필로 소감문을 쓰는 사례까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소감문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개선 활동한 내용이 스스로도 신기하여 한 작업자가 작성한 내용인데 “몇 년 동안 일 못한다고 욕만 먹었는데 요즘 며칠 동안은 일하고 나서 무척 보람을 느낀다.” “ 처음에 100% 생산성향상 한다고 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 했고 또 한국 사람이 왔으니까 저러다가 한달 지나면 가겠지 라고 생각 했는데 결과가 신기하게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우리 모두 열심히 해서 반드시 목표 달성을 하고 한국 공장 보다 잘하는 공장으로 만들어 보자“ 이런 내용 이였습니다. 저 역시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되었고 더욱 희망을 주고 경쟁심을 올리기 위하여 한국공장 생산 실적 자료를 공유토록 하여 반드시 여기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결과 20여일 만에 1000대를 달성했으며 품질향상 역시 50%를 상회하는 실적을 올렸으니 현지 부서장들은 그 후 항상 그 곳에 출장 가면 “사부님”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우고는 합니다.
진정한 꿈을 향하여 2000년도가 되면서 전 국민이 희망찬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꿈에 부풀어 있을 즈음 대우전자는 ‘97년 대우사태로 인한 전사원의 임금동결, 일 더하기 운동, 원가절감, 등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차 구조 조정을 하였고 2002년도에 2차 구조 조정으로 모니터사업부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모니터사업부는 전원이 합심하여 일을 했고 경쟁사와 생산성이나 품질에는 차이가 없었으나 대부분 모니터는 세계 일류 컴퓨터 업체의 OEM생산을 하지 않으면 채산성 확보에 어려움이 있는데 경영상황이 직접투자와 연구개발 투자가 중단된 상태라 BIG OEM 업체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업부가 폐지됨에 따라 모니터사업부 소속 사원 전체는 졸지에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예외가 있을 수 없었으며 길게는 20여년 청춘을 바쳐 열심히 근무한 많은 사원들이 뿔뿔이 헤어져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사원들이 주축이 되어 모니터사업부를 다시 살려보자는 취지에서 종업원들께 분사 해 줄 것을 요청하여 영업을 위주로 하는 회사와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2개의 분사 회사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니터사업이 한국에서 시작한지 20여년이 지났고 그동안 우리 회사뿐 아니라 국내의 모니터 생산 기술이나 세계시장 점유율로는 엄청난 발전으로 세계 1위 국가가 되었지만 치열한 가격 경쟁상태에 있는 제품으로 대부분의 제조업이 그러 하듯이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동남아로 이전하고 특히 대기업은 일부 내수를 제외하고는 공장 자체를 글로발화 하여 현지로 이전하는 상태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시장을 상대로 제조업을 중소기업으로 출발 한다는 것이 상당한 무리수임을 알지만 같이 근무했던 고부가가치 인력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뿐 아니라 확실한 생산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설비와 시스템을 버리기에 너무 아쉬움이 많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제조업 공동화 현상을 우리들만이라도 최후까지 온 몸으로 막아 보겠다는 각오로 제조 전문회사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제조 전문회사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한 노하우와 경험을 가진 사원들로 만들어진 회사로 원가에는 대기업의 고비용에 비길 수 없이 그야말로 혁신적인 제조비용으로 50%이하로 가능하며 품질 및 납기 측면에는 대기업에 전혀 손색이 없고 중소기업이 없는 완벽한 생산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어 대기업의 단점과 중소기업의 단점을 보완 운영하는 회사가 가능합니다. 한 회사의 제품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용 대기업 제품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수 없었던 중소기업 수출, 내수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관계로 각 회사의 장점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품질 역시 각 회사의 중요한 부분을 다른 회사에도 적용함으로 품질 수준이 오히려 단일 공장 제품보다 우수 하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의견 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들이 국내, 세계시장에 150만대 이상 팔려 나갔지만 제품 생산을 의뢰했던 대기업, 중소기업 모두 납기, 품질, 제조비용에 대한 만족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품질 클레임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동남아 제품보다 부가가치가 월등히 높은 경쟁력 확보로 한국을 떠났던 제조업체들이 다시 한국으로 복귀하는 그날까지 제조 전문회사로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개인의 회사가 아닌 우리 모두의 회사로 생각하고 끊임없는 개선활동으로 바이어로부터는 제조비용 인하, 품질향상으로 보답하고 사원들께는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회사로 거듭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우리 회사 제조 제품은 세계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생산기술 세계 Top 1‘ 회사로 발전하는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또 다른 꿈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2005. 3. 심 일 섭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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