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 부장님이랑 영화찍었다”
 

‘창조 경영’에 목마른 기업들은 간부와 직원들의 창의성을 자극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Weekly BIZ는 지난 주말 남이섬에서 컨설팅회사인 비즈리즈(BizRiz)가 진행한 창의성 개발 프로그램 현장에 동행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삼성, LG, SKC, KT 등의 임직원들이 참가했다.


■입 다문 오페라, 대사 없는 영화,….


# 장면 1


스산한 겨울 바람이 창을 치는 호젓한 오후. 대형 강당에 모인 60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뻥긋 대는데, 단 한 사람의 노래 소리만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던 고(故) 루치아노 파바로티. 조명을 모두 꺼 어둑어둑한 가운데 밝게 빛나는 대형 스크린 속에서 파바로티 홀로 열창을 하고 있었다. 곡목은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


비록 ‘립싱크’였지만 참가자들의 몸은 화면 속의 파바로티와 같이 떨리고 있었다. 열정에 넘치는 파바로티의 제스처도 자연스레 나왔다. 표정은 고통에 찬 듯 찌푸렸다. 이들이 이런 독특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강사의 ‘이색 주문’ 때문. “파바로티는 머리 속으로 음악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파바로티와 호흡을 같이 해보세요. 이 노래는 타타르국의 왕자 칼라프가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와 사랑의 승리를 확신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승리를 외치는 주인공의 감정으로 불러보세요”

참가자들은 곡 내내 파바로티와 함께 호흡했다. 노래가 절정으로 치 닫을수록 참가자들의 감정도 격해졌다. 곡이 끝나고 눈을 뜨자 스크린에서 아직까지도 감정에 취한 파바로티의 표정이 잡혔다. 따라 부르던 한 참가자는 “숨을 참고 파바로티와 함께 마음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별 빛 아래 ‘승리! 승리’를 외치는 이국 왕자의 모습이 그려졌다”고 말했다. 감동은 짧았지만, 감성의 여운은 오래갔다. 몇몇 참가자들은 아직까지 감정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쉽사리 자리에 앉지 못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 장면 2


“조금 더, 어눌하게 해야지! 이 캐릭터는 한심하면서도 고집 가득 찬 불쌍한 건달이야.” 감독의 주문에 따라 머리에 대머리 가발을 쓴 남자가 바보 같으면서도 왠지 완고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휘발유’ 역을 맡은 참가자였다. “바보 같으니까 몸 짓도 이렇게 슬로우 모션으로 한번 해 볼게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굼뜬 동작으로 사진 찍는 시늉을 했다.


‘세 시간 반 안에 실제 영화와 차별화된 5분짜리 영화를 만들라’는 미션에 따라 촬영을 하고 있는 세트장 안엔 팽팽한 공기가 흘렀다. 그들이 ‘재구성’해야 할 장면은 ‘사기꾼’ 일당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 장면. 일일 연기자들은 아예 대사를 ‘자신들만의 언어’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 ‘접시 돌린다(사기친다는 의미)’는 표현이 낯설어서 도무지 감이 안 살아. ‘나 한번 뜨면 다 작살나’로 바꿔서 해야겠다.” 웃음이 쏟아졌다. “이런 건달이라면 분명 이렇게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각각의 상황에서 전문 연기자 같이 ‘애드립(ad lib)을 치는’ 참가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연기자들은 곧 각 캐릭터의 상황 속에 완전히 몰입했다. 침을 뱉거나, 지나가는 여인을 노골적으로 흘깃대며 휘파람을 부는 등 대본에 없는 행동도 자연스레 나왔다. 극중 ‘김선생’ 역할을 맡은 KT 박성준 부장은 “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완전히 내가 이 사람이 됐다는 생각이 들어 끊임없이 상황을 창조하게 됐다”고 말했다. 극중 ‘제비’ 역으로 열연을 펼친 원용희 KT 유시티(U-City) 부장도 “카메라 앞에 처음 서 봐 얼떨떨했지만,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 기업들을 상대로 창의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컨설팅회사 비즈리즈(BizRiz)가 남이섬에서 진행한‘도예로 이미지 형상화하기’과정에서 한 참가자가 도자기에 나무 모양을 새기고 있다. /비즈리즈(BizRiz) 제공

# 장면 3


이튿날. 참가자들은 생전 처음 드릴과 톱을 잡았다. 나무에 구멍을 뚫고, 모양을 내기 위해 통나무를 ‘썰기’ 위해서였다. 나무의 모양은 어느새 작은 의자가 돼 갔다. 도자기엔 칼로 원하는 형상을 새겼다. 물컹한 흙과 딱딱한 나무를 번갈아 잡으며 ‘제 2의 뇌’라는 손을 통해 다양한 촉감을 경험했다.


도자기 위해 글씨를 쓰는 사람, 바다 갈매기를 그리는 사람, 추상적인 무늬를 그리는 사람…. 무언가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참가자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이런 건 중학교 이후 처음 해보는 데, 고객 마케팅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네” “여기에다 멋진 시를 한편 써봐야겠다”. 여기저기서 다양한 반응이 들려왔다. 차영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책상에 앉아 일만 하는 것 보다 나와서 뭔가 내 손으로 만들어 보니, 전혀 새로운 뭔가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연극으로 고객 가치 느끼고, 미술품으로 직원들의 정서 자극


기업들은 특별한 교육 이외에, 일상 속에서도 창의성을 촉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KT는 고객가치혁신이란 딱딱한 비전을 조직 내에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새롭게 ‘연극’이란 도구를 택했다. KT는 지역 본부 별로 ‘끼 있는’ 사람들을 추려내 비전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전국 연극 대회’를 열었다. 지역 예선과 본선이 4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조직원들은 회사의 비전을 일상 언어로 표현한 대본을 직접 만들고, 소품을 만들며 비전을 몸으로 느꼈다. 본선 작품들은 모두 사내 방송을 통해 방영됐다. 또 인터넷 사이트에 연극 동영상들을 올려 조직 구성원들이 수시로 볼 수 있도록 했다. KT 박근영 상무는 “직원들의 ‘언어’로 회사의 비전이 소통될 수 있도록 한 기회였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도 예술을 창조 경영에 활용한다. 미국의 일부 선진 IT 기업들은 창의성을 지닌 최고 단계의 리더인 ‘레벨 5’ 리더를 육성하고 있다. 하드파워와 적극적인 홍보를 특징으로 하는 ‘레벨 4’ 리더와 달리 ‘레벨 5 리더’는 내면 성찰과 창의성을 갖춘 리더다. 이들은 기업의 핵심을 자원이 아닌 가치(value)에 두고, 가치보다 문화(culture)를 더 중시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예술을 창의적인 기업문화 창달의 핵심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MS가 1987년부터 구입한 작품의 숫자는 무려 4500점을 넘는다.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미술품을 늘 접하면 직원들의 창의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새로운 기업문화가 창의적인 제품개발로 이어지고, 그러한 제품과 기술이 다시 새로운 문화를 다지는 선순환을 기업들은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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